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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 떠돌이 달


우리를 흩뿌린 것은 떠돌이 달이다.

우리의 포자는 하늘을 떠돌고 바람에 흘러 다니다 악취 나는 이 땅에 내려앉았다. 달빛이 우리를 적시고 대지는 우리를 보듬어, 마침내 우리는 싹이 터 우리가 되었다.






늙은 것이 말했다.
우리들은 여기저기서 나타났지. 하수구 뚜껑 아래에서, 갈라진 길 틈에서. 지붕 아래에서, 때로는 바위틈에서, 때로는 풀무더기 틈에서, 때로는 나무 둥치에서, 그렇게 우리들이 나타났어. 무엇이 우리를 퍼뜨렸는지는 몰라. 아마도, 어디선가 날아온 떠돌이 달이라고 하지.

때가 되면 그 떠돌이 달이 다시 나타나 우리를 빨아올릴 거야.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시루에 가득 박힌 콩나물처럼 하늘을 바라볼 테지. 검푸른 밤하늘일 거야. 차가운 달빛이 어두운 세상의 끝을 살짝 적시고 있을 거야.
굶주리던 이도 고통 받던 이도 방황하던 이도 외롭던 이도 행복한 이도 애착 많은 이도 모두 그 달빛을 따라 세상 하늘 위로 떠오를 거야. 그 달에 오르면 우리는 우리의 별로 돌아가는 거지. 아아, 가끔은 우리 모두가 떠오르기도 전에 떠나야만 하는 이들도 있어. 그들은 우리들 눈에 뜨이지 않을 때 사라져.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떠난 흔적만 남아 있는 거야. 슬퍼하지도 동정하지도 말아야 해. 이곳에는 우리의 진짜가 없어. 우리는 말이야, 그들의 눈이 비추는 환상이야. 그 눈에 투영되는, 그들의 욕망과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소망이 그 손에 닿는 곳에서 실체화된 환상이지.
나는 한 살에 늙은 것으로부터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팔다리는 진흙투성이에, 머리털은 피와 오물에 젖어 처참했고,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늙은 것이 먹을 것을 주었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삼킨 다음에 보니 반쯤 썩은 생선머리였다.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내 울음은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가 삼켰다. 늙은 것이 나를 달랬다.

“괜찮아, 너는 예쁘게 생겼잖아. 좀 비싸게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 더 더러워지기 전에 길바닥에 서서 주인을 찾아봐. 네 밥을 주고 머리를 빗겨줄 사람을 찾으라고. 너 같은 애들 몇 놈 보긴 했지만, 그중 대부분이 그냥 굶어죽던가 길바닥에서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사람을 따라가 매달려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지. 못된 애들 손에 걸려 봉변당한 녀석들도 없진 않지만.”

늙은 것은 길에서 나고 길에서 자랐다. 출처도 연도도 다양한 누더기를 걸치고 고약한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러나 그 늙은 것의 눈은 다정했다. 내 머리에 모자를 씌워 주고, 내 귀를 씻겨주고 볼의 진흙도 닦아주었다.

“나는 늙었지. 너처럼 어리거나 젊은 것들처럼 지켜야 할 것도 없고 더 얻어야 하는 것도 없지. 서른 녀석도 넘게 내 배에서 났지만, 그 어린 것들도 나를 잊은 지 오래일 거야. 나도 그 애들을 잊었지. 나는 혼자 떠돌다 어디선가 누울 테고, 졸음이 밀려들면 눈을 감을 거야. 그러니 너도 네 살길을 어서 찾아 가렴.”

늙은 것의 옷자락을 질질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는 없었다.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가는 길도 모른다. 그녀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이 길바닥에 혼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 도리가 없었다. 먹을 것이 어디에 있는지, 입을 것을 어디서 구할 지, 잠은 어디서 자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 아니, 도움을 받을 수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혼자만 아니라면 뭐든 좋았다.

떠돌이 달이 어째서 이런 곳에 우리를 퍼뜨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보다 조금 작을 뿐이지만 힘은 무시무시하게 약했다. 먹을 것을 사고 입을 것을 사고 잘 곳을 구하는 돈을 구할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없었다. 언어조차 우리들의 언어는 그들과 달랐다. 그런데 인간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돈을 지불한다. 우리 일족이 하나둘 나타나고, 그 존재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래도 인간은 우리 일족이 환상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그들을 감동시킨다. 우리들의 아름다움은 그들을 감동시켰고, 우리의 무력함은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들은 우리의 아이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아이들이 크고 그 아이들이 또 아이들을 낳아, 우리가 떠돌이 달에서 왔는지 반쪽 달에 왔는지조차 모르게 커나갔다. 나도 그렇게 컸다. 아니, 나는 내 어미의 얼굴조차 모른다.

늙은 것은 그래도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아직 뼈도 굳지 않은 어린 내가 조금 컸을 무렵, 늙은 것은 차에 치어 죽었다. 내 눈앞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늙은 것의 육신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마자 육중한 트럭이 달려와 그것을 밀고 지나갔다. 다시 다른 차가 밀고 지나갔고, 잠시 뒤에 그곳에 남겨진 것은 납작하게 들러붙은 늙은 것이었다. 우리의 뼈는 가볍고 무르다. 부서지면 그렇게 산산이 부서진다. 우리는 유리같은 환상이고, 한번 놓치면 그렇게 산산이 부서진다.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겁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나는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골목을 알고 일족을 알고 인간을 알았다. 나는 혼자였으나,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고 골목에도 있었다.




그 날은 또 비가 엄청나게 왔다. 이른 봄이었던 지라 비가 휩쓸고 있으니 금방 오싹 오싹 추웠다. 처마 밑에나 숨어 있을까, 아니면 담을 넘어 남의 집에 숨어 있다가 비 그치면 나갈까, 귀찮은데 이러고 있지 뭐, 등등.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들처럼 힘이나 세면 누군가를 두들겨 패서 돈이라도 빼앗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을 패기는커녕 세살 아이에게조차 얻어맞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연약했다.

그러고 있을 때, 비 쏟아지는 골목길 너머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비틀 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내 앞에 오면 그냥 쓰러져 기절하든 죽든 할 듯 보였다. 발걸음만 들어도 일족인 걸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발자국은 가볍고 인간의 발자국 소리는 육중하다.
사내 녀석이었다. 나이는 나하고 비슷하든가 좀 어릴까, 하지만 일족치고는 덩치가 제법 되는 녀석이었다. 키는 인간과 맞먹거나 오히려 더 커 보였고, 어깨도 떡 벌어져 힘도 세 보였다(실제로는 다섯 살 아이와 한바탕 하고도 엉엉 울 정도의 완력일 뿐이지만). 얼굴은 짙은 갈색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검게 그을린 얼굴이라고 해야 하나. 비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미용실에서 잘 다듬어 준 머리였다. 얼굴은 전광판에서 번쩍거리는 모델 녀석들만큼이나 잘 생겼다. 목에 걸려 반짝이는 목걸이에는 간혹 지나다니며 보는 명품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주인이 있는 녀석이다. 그것도 부자다. 하긴, 저렇게 멋지게 생긴 녀석이라면 어느 주인이 홀딱 반하지 않을까.

그런데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멋진 녹색 눈이었다. 비에 젖은 속눈썹도 길었다. 녀석은 멍하니 나를 보더니 뭐라 중얼 거렸다. 나는 귀를 쫑긋거리며 기울여주는 척해보았다. 응, 그래, 그래, 뭐라고? 녀석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전히 쫑긋거리는 시늉만 했다.

“.....고파.”

나는 여전히 모르는 척 했다.

“배고.....파.”

그리고 녀석은 내 앞에 널 부러졌다. 내 발목을 꽉 붙든 채로.
빗방울이 함석지붕을 신나게 후드려 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녀석에게 오늘 사냥한 쥐 한 마리를 건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보여주니 녀석은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며 말했다.

“이걸 어떻게 먹어.”

나는 쥐로 녀석의 볼을 두어 대 휘갈겨 준 다음 그냥 뜯어 먹었다. 피냄새가 풍기자, 그제야 녀석도 군침이 도는지 입을 꾹 다문 채로 보았다. 나는 반쯤 뜯어먹은 것을 내밀었다. 녀석은 고개를 돌리고 코를 막더니 그것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입술사이로 핏방울이 스며 나오자 슥 닦았다. 내가 물었다.

“넌 어떻게 된 거야?”
“몰라. 그냥 정신 차리고 보니 길바닥이더라고.”

이렇게 말하는 녀석들이 이 꼴이 된 이유는 대체로 하나다.

“버렸군.”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마마는, 마마는 절대 아니야! 어제까지만 해도 밀크에다가 태평양에서 잡아온 킹 크랩 살을 말아 줬다고! 버릴 리가, 버릴 리가 없어!”

나는 한심해졌다. 아 글쎄, 나도 어린 시절에 내가 그 꼴이 될 줄 알았던 게 아니거든. 나의 그녀, 나의 마마역시 내게 온갖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무슨 무슨 식이음식이니 뭐니 하며 사다 바치고, 옷을 사 입히고, 놀이감을 사다 바치고, 달콤한 간식을 먹여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길바닥 어딘가에 버렸다. 역시나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다. 사흘을 굶었지, 아마. 내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는 데는 참 오래 걸렸다.

이제 녀석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더 없냐는 눈빛이다.

“그럼 네가 저절로 밖에 나와 있게 되었겠냐. 어이, 이름은 뭐지?”
“리쿠. 우리 마마는 언제나 프린스 리쿠라 불렀지. 마마의 친구들도 나만 보면 탄성을 질렀어.”

그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하긴, 누가 주인이라도 그렇게 할만한 대단한 녀석이었다. 얼굴도 크고 무게도 많이 나가고 고약한 요구나 하는 주제에 먹을 것도 많이 먹는 인간 남자보다야, 이 녀석처럼 잘 빠지고 아름답고 가볍고 냄새도 안 나는 녀석이 더 좋았을 것이다. 뭐, 나의 마마도 나의 은색 머리털을 빗겨줄 때마다 우리 코니가 최고야, 최고야 했더랜다.
녀석은 손끝을 사악 사악 핥아 씻고는 물었다.

“네 이름은?”
“코니. 하지만 인간하고 살지 않은 지 벌써 몇 년 째라서, 이름이 없다고 봐야지. 이 골목 패거리 애들은 그냥 하얀 녀석이라고 불러.”
“골목?”

리쿠의 얼굴이 당장에 시커매졌다.

“어젯밤에 봤어! 정말이지 무서운 녀석들이었어! 그냥 여기 어디냐고 물어본 정도인데 우르르 몰려들어서 두들겨 패더라고.”
“이봐, 너 어제 다른 일족 자체를 처음 본 거 아냐? 그런 녀석들 가끔 있던데. 신참이 그렇게 느닷없이 나타나서 물어보면 원래 그래.”

나도 너무 어렸을 때 어미 곁을 떠나서 내 일족은 길바닥에 버려진 이후에 처음 봤다.
리쿠 녀석은 귀를 눕히고 노려보았다.

“이봐, 너 나를 완전히 도련님 취급하고 있는데 절대 아니라고. 이래 뵈도 배회하는 일족과 같은 집에 있었던 적도 있어.”

이건 뭐 나도 담배 핀 아이랑 만난 적 있어, 불량학생들은 잘 안다고! 하고 말하는 모범생 비슷하게 보인다.

“여자애였지. 무척 예뻤는데, 성격은 정말 고약했어. 나만 보면 머리털을 곤두세우며 신경질을 냈지.”
“후드려 맞진 않았냐.”

녀석이 다시 노려보았다.

“당연한 거 아냐! 이래 뵈도 난, 이렇게 덩치도 좋고, 어딜 놔두어도 싸울 수 있다고. 내가 길을 배회하지 않은 덕에 너희들이 영역을 지키고 살 수 있는 거야.”

보아하니, 싸움은커녕 한대 맞아보지도 않은 녀석 같아 보였다. 발톱만 세워도 우에에엥 하고 도망칠 걸.
다시 녀석의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비가 이렇게 오니,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 듯 보였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비가 하얗게 내리는 하늘 너머로 비행선이 지나갔다. 저 안에도 분명 사람들이 있을 테고, 돈 많은 녀석들은 우리들 같은 녀석들을 키울 테지. 옛날의 그녀는 내가 어렸을 때 나를 안고 옥상에 올라가 그 비행선을 보며 말했다. 어제 드라마를 보니 저기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고백했어. 멋진 티파니 반지를 주면서 말이야. 반지보다 그 하늘색 상자가 더 예뻤지.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거만하게 일어났다.

“하여간, 일단 나는 우리 집을 찾아봐야 겠어. 찾으면.... 음, 이 보답은 할 게. 우리 마마는 우리 일족에 후하거든. 밥하고 간식도 줄 거고, 잘하면 우리집에서 며칠 지내다가 좋은 집으로 가서 새로운 파파나 마마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거 안 한다. 우리 일족은 말이야, 자유로운 게 최고라고.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떠돌이 달이 나타나면 날아가는 거지. 집안에 있으면 떠오르다 천장에 박혀서 영원히 이 지상에 머물러야 한다고. 이 춥고, 더럽고, 무겁고, 지겨운 세상에.”
“떠돌이 달? 아, 그거 우리 엄마가 말해준 적 있어. 엄마는 엄마의 엄마한테 들었다고 했지.”
“어라, 샵출신 같아 보이는데?”

나는 녀석이 새카만 귀와 잘생긴 얼굴, 그리고 멋지게 뻗은 꼬리를 보았다. 나 역시 그 덕에 샵에서 어린 시절(아니, 갓난 시절)을 보냈다.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난 엄마랑 누나들하고 독립시기 전까지 같이 살았어. 누나들도 다 그랬고. 우리 마마가 나를 데리고 간 거야. 가끔 마마가 전화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다들 잘 지내고 있대. 큰 누나는 아기들을 셋이나 낳았다고 하더라고......아아, 다음 주에 조카들 보러 가기로 했었는데, 이게 뭐야!”

운이 좋은 녀석이네, 나는 다시 심드렁해졌다. 뜨뜻한 집에서 태어나, 엄마의 품속에서 다 자랄 때까지 지내고, 그러다 새 주인을 만나 혼자서 편하게 잘 지내온 것이다. 나는 다 자라기도 전에 끌려나와 샵 윈도우에 갇혀 이주일이나 보내야 했다. 그러다 우리 마마를 만났다. 마마 옆에는 키 큰 남자가 있었다. 마마가 나를 가리키며 졸라댔고,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나를 사서 나가 마마에게 건네주었다. 난 아이였다.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는데, 마마는 귀엽다고 볼을 비벼대고 당장 먹을 것과 옷부터 사러 가자고 했다.

그 때 마마는 행복했던 것 같다. 너무 행복하고 너무 만족스러워서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며 꿈을 꾸고, 구석에 가득 쌓인 잡지책을 오리며 언젠가 그것들이 자기 것이 될 날을 꿈꾸곤 했다. 나는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값지고 가장 예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환사으이 시작이었다.

녀석은 젖은 귀가 싫은 지 연신 귀를 털어댔다. 그러나 다시 빗방울이 떨어져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녀석은 귀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는 녀석이 참으로 가련해 보였다. 나도 그랬단 말이다, 녀석아.

“그래봤자-”
“응?”
“넌 버림받았어.”
“그럴 리 없다니까! 나를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해 봐. 네가 뭐가 아쉬워서 가출을 했겠니, 아니지? 그런데 눈을 떠보니 전혀 낯선 곳에 떨어져 있다, 네 마마가 가져다 놓지 않는 한 불가능해. 앞을 보고 뒤를 봐도 온통 처음 보는 것 뿐이고, 사람들이 오거니 가거니 하며 너를 흘끔 흘끔 보지. 겁은 엄청나게 나는데, 마마는 보이지도 않고. 와, 버림 받은 거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별 수 있니. 이제부터 길바닥 생활에 익숙해 져야지. 하루 종일 먹을 것 찾으러 다니다 지쳐죽어 길바닥에 쓰러지는 인생.”
“마마한테 돌아갈 거야!”
“길을 알긴 아냐.”

녀석의 얼굴이 다시 시커매졌다.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우아아아아아,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이, 그러면 같이 사냥이나 하러 다니자고. 어차피 여기 골목대장이란 녀석이 엄청 질이 나빠서, 너나 나 같은 애가 혼자서 다니면 정말 고약하거든.”
“싸움 같은 거 하면 다친단 말이야!”
“우리가 안 걸어도 녀석은 신입이 들어오면 반드시 싸움을 걸러 온단 말이야. 특히나 먹을 것이 있는 곳은 더더욱 위험하지. 그러니 힘을 합쳐야 한다고.”
“먹을 거?”

녀석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최근 요 근방에 먹을 것이 계속 놓이고 있어. 며칠 먹고 있는데 말이야, 그 골목대장 녀석이 떡하니 나타나더라고. 일단 자기부터 먹겠다나아? 근데 그 녀석 다 처먹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녀석의 입에 벌써 침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 난 녀석이 싸울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저 둔한 엉덩이와 다리를 보니, 한방 맞고 뻗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키가 크고 덩치도 있으니, 대장놈이 당장 저 녀석부터 때려눕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틈에 먹을 것을 해 치우고.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녀석은 벌써부터 먹을 것 생각밖에 나지 않는 듯 보였다. 하긴, 배가 고프니 생각이든 뭐든 전혀 할 수 없지. 아니다, 애초에 생각 자체를 못하는 듯 보이기도 하다.

“비가 그치면 가자.”

나는 매우 친절하게 제안했다. 녀석은 감동한 듯 했다.

“운이 좋구나, 나! 다들 나만 보면 으르렁대고 때리려고만 했지, 너처럼 친절하게 해 준 애는 없었어.”
“그래도 다행으로 여겨라. 인간이었다면, 너 아마도 그 몸에 걸친 거 다 빼앗긴 다음 팔려갔을 거야. 우리는 인간하고 달라서 네가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게 아무 쓸모도 없거든.”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들을 수는 있어도 말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언어는 인간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냥 우냥냥, 우아웅, 비슷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약하고 아름답고 무력하다. 이 얼마나 멋진 환상인가. 환상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환상인 법이다. 우리는 최적의 환상이다.
비는 저녁까지 계속 되었고, 밤이 되자 나는 녀석에게 준 쥐의 엉덩이를 무척이나 후회하게 되었다. 녀석은 그 추위에도 꾸벅꾸벅 졸더니 결국에는 푹 잠들었다. 비는 어느덧 잦아들다 그쳤다. 그러자 땅과 하늘의 냉기는 더욱 혹독해졌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녀석은 덜덜 떨면서도 자고 있었다. 나도 예전에는 푹신한 깃털 방석 위에서 자던 때가 있었지, 휴- 그리고 마마는 내 머리를 쓸어주었어. 하늘 위로는 비행선이 부유했다. 쏘아져나오는 조명이 좁은 그녀의 방을 비추었다.

아름답지, 코니?

그녀가 속삭였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비행선을 타고 이집트로 여행을 갈 거야, 그이가 그렇게 약속했어. 이번 사업 잘 되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우리, 결혼할 거야. 이런 좁은 방이 아니라, 저기 저 높은 팰리스로 이사가는 거야. 그러면 코니, 네 방을 하나 따로 만들 거야. 네 여자친구도 들여올 거야. 음, 어린 아이가 좋겠지? 그러면 처음부터 너한테 고분고분할 거 아냐. 아가들도 잔뜩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다 키울 거야.

나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녀가 없을 때 그녀의 남자가 전화하던 것이 생각났다. 욕하고 화내고 있었다. 그리고 전날, 그녀의 남자는 그녀에게서 돈을 받아갔다. 그녀는 잠자코 듣더니, 살짝 웃고는 카드를 들고 어디론가 나갔다 들어왔다. 남자는 머리를 긁으며 정말 미안하다고, 금방 갚을 거라고 말했다.
남자가 떠나자, 나는 그녀 곁으로 가서 그 허벅지에 머리를 댔다. 그녀는 나를 쓸어주었다. 그러고 웃었다. 다 잘 될 거야, 정말 잘 될 거야, 그럴 거야, 난 믿어. 아아, 코니. 너처럼 아름다우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지금보다는 멋지게 살 수 있을 텐데.

“야, 야.”

녀석이 흔들어대자 나는 깨어났다. 녀석은 벌써 머리가 다 말라 있었다. 내내 열심히 다듬은 듯 빤질빤질 빛이 났다.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녀석이 안달했다.

“먹으러 가야지! 배고파, 나! 그런데 그거, 먹을 만한 거야?”
“그럼. 집에서 사는 녀석들 먹는 것보다 좋더라고. 자, 가자.”

녀석은 일어나서 머리단장을 시작했다. 귀도 털고, 손등도 깨끗하게 씻었다. 아주 그냥,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다. 어딜가나 잊지 않는 저 몸단장이라니! 하긴, 나도 마마에게 잘 보이려고 저렇게 단장하던 시절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네 마마란 여잔 뭐하던 여자나?”
“몰라.”

생각보다 더 단순한 녀석 같아 보였다. 정말로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 기준으로는.... 음, 돈이 많아. 가끔 나를 데리고 팰리스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갔으니까. 그곳에 마마의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지. 나를 무척 좋아하셨어. 특히나 마마의 어머니는 나만 보면 엄청나게 퍼 먹이셨지.”
“그래봤자, 네 마마가 결혼하면 너는 완전히 찬밥신세라고. 하긴, 결혼을 할 예정이라 네가 버림받은 걸지도 모르네.”
“버림받은 거 아니라니까! 그녀는 나를 정말로 정말로 사랑했고, 인간 남자같은 건 생각도 안 해! 가끔 찾아오는 남자가 물론 없는 건 아니지. 종종 하룻밤 자고 가기도 하는데, 그 남자들 마다 나만 보면 너무 멋지다니 너무 매력적이라느니 나같은 녀석하고 사니 인간 남자가 눈에 차기나 하냐느니 하고 아부를 해댔지. 뭐랄까, 나한테 잘하는 걸 보여서 마마한테도 잘 보이겠다는 건지 뭔지. 어쨌건 우리 마마는 인간 기준으로는 정말 매력적이니까, 그럴 만 하지.”
“그냥 돈이 많아서 들러붙는 거 아니야?”
“아니야, 정말 매력적이라고! 멋져, 멋지다고!”

녀석은 울 듯한 기세였다.
나의 마마는 아무리 내 주인이라도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부은 듯한 작은 눈에 얼굴은 크고 넓적했다. 주눅 든 듯한 표정이 그녀를 더 우울하게 보이게 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고..... 그러다 결혼할 남자를 만나서 널 버린 거 아니냐고.”
“버린 거 아냐! 그리고.... 마마는 벌써 결혼한 적이 있어. 헤어졌지만.”
“어라, 왜?”
“남의 시선 때문에 불행을 참고 산다는 건 너무 억울한 거 아니냐고 나한테 말한 적 있어. 혼잣말이었지만. 울면서 그랬지. 나야 그냥 안아주기만 했지. 우린 그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잖아. 그녀는 그걸로 된 것 같았어. 요즘도 간혹 울긴 하는데, 나만 보면 행복해진다고 했어.”
“그런데 널 버렸잖아. 왜 그랬을까?”
“버린 거 아냐.”

녀석은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려면 꽤 걸릴 듯 했다.

마침내 먹을 것이 놓인 골목에 도착했다. 팰리스로 이어지는 골목이었는데, 사람들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먹을 것이 놓여 있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생선살점이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다. 리쿠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와아, 저거 내가 좋아하는 거야!”
“쉿, 쉿. 온 동네 일당들이 다 노리고 있다고. 가만, 가만........여기 두목 녀석은 정말 고약하다고 몇 번 말해야 해.”
“얼마나 고약하기래?”
“비겁하게 칼도 쓰고, 더욱 비겁하게..... 등 뒤에서 공격하길 즐기지. 정말 고약한 건 동네 여자애들을 모조리 건드린다는 거고. 네가 여자애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라. 여자애였으면 동네 들어오는 즉시 끌려가서 한번 당하고, 그 두목이 질릴 때까지 그놈 여자로 있어야 할 테니.”

특히나 다른 남자와 낳은 아이를 죽이는 고약한 짓도 서슴치 않으니 더욱 문제다. 사내녀석이 대장이 죄면 여자아이가 대장인 곳 보다야 문제가 많은게 당연하다지만, 이 동네 녀석은 특히나 질이 나쁘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밀었다.

“일단 먼저 먹어. 나는 망볼게.”

녀석이 감동했다.

“너 정말 착한 녀석이구나! 너도 같이 먹어! 너 나 도와줬잖아.”

아아, 이 착한 도련님 같으니. 여자애가 아니길 정말로 다행이다. 여자애였으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했을지 생각하면, 눈앞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녀석은 크고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덩치까지 큰 녀석이 이러니, 미치겠다. 동네 여자애들이 골목대장 눈치 보느라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물 좋은 동네에 갔으면 벌써 온갖 여자애들이 달려들어 옆을 맴돌고 있을 텐데.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둘 다 같이 먹을 수는 없어. 내가 먹고 있는 동안 네가 망보면 되는 거야.”
“정말? 그럼 조금만 먹고 올게!”

바보 도련님은 그릇으로 다가갔다. 구수한 냄새에 위험이고 뭐고 간에 생각도 안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 그래, 한방 맞아 보라고. 여태까지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곱게 자라왔는데 한번 당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녀석이 생선 살점을 입에 넣다 말고 갑자기 귀를 쫑긋 세웠다. 왜 저래, 저 녀석. 나는 녀석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고개를 팩 돌리더니 머리를 확 곤두세웠다. 음? 하고 보는데, 녀석이 내게로 뛰어왔다. 그냥 달려오는 게 아니라, 펄쩍 펄쩍 뛰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에 머리위로 비행선이 부우- 하고 지나갔다. 인간에게야 그냥 바람소리 비슷하지만, 귀가 예민한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꽤에엑, 하고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 순간에 녀석의 몸이 내 머리위를 날아갔다. 멍하니 돌아보는 순간에, 퍽, 하고 후려갈기는 소리가 터졌다. 크르릉, 캬아앙,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바닥에 뒤엉켜 뒹굴고 있는 녀석과 검은 털의 골목대장을 보았다. 녀석은 발톱을 세우고는 대장을 후려갈기고, 목을 물어뜯었다. 대장이 날래고 독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공격을 당한데다가 일단 녀석의 덩치가 너무 커서 몰리고 있었다.

맙소사-

저 골목대장 녀석, 날 노린 것이다. 순진하고 만만해 보이는 신참이야 나중에 손봐줄 수 있고, 요즘 깐죽대며 돌아다니는 나부터 손보려 한 것이다.
도망가려면 지금이 딱 좋았다. 이대로 도망가서 다른 영역으로 도망가자, 그곳에 눌러앉아 살면 되는 것이다. 할퀴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울부짖었다. 이제 슬슬 딸리고 있었다. 그래봤자 신참에 도련님이다. 덩치 커서 한방 날리는 것도 한번이다. 녀석은 후려 맞고 나가떨어졌다. 그런데 이 멍청한 녀석, 도망칠 일이지 다시 달려들었다. 굶어서 제정신도 아닐 텐데 마구 달려들고 있었다.

“야, 이 멍청아! 그만 둬야지!”

하지만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처음 싸우는 녀석인지라,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도망치는 지조차 모르고 무조건 밀어붙이고만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달려갔다. 녀석이 마구 발을 휘젖고 있는 틈에, 대장의 등 뒤로 가서 한방 후려갈겼다. 대장이 으르렁대더니 품안에서 칼을 꺼냈다. 우리들은 도구를 사용하기엔 턱없이 약하다. 그러나 대장은 특이한 녀석이라, 팔 힘이 굉장했다. 아마도 저 신참 녀석도 냉장고 문을 열 정도의 완력은 있을 테지만, 그건 그거다. 이런 종류의 난폭함과는 완전히 다르다. 녀석이 귀를 눕히고 이를 드러냈다. 잘생긴 얼굴도 그 표정만큼은 어쩔 수 없다. 대장이 칼을 그쪽으로 먼저 휘둘렀다. 나는 그 대장의 등을 향해 달려들어 목을 물었다. 대장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이 달려와 그 팔목을 물고 늘어졌다. 좋은 환경에서 잘 먹고 큰 녀석답게 턱 힘이 정말 굉장했다. 우둑, 하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뒤엉켜 싸우고 캥캥 대고 컹컹대다 다다다 달려가는 소리도 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가 핑핑 돌고 어지럽고 배는 고프고. 녀석은 아예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 쪽으로 기어갔다. 대장은 벌써 피를 뚝뚝 흘리며 도망쳤다. 저 꼴이라면 오늘 밤 피 냄새 맡은 밤 일족이 가서 먹어치울 지도 모르겠다. 내일 머리하나만 남아 있을 지도 모르겠네.

다가가니 녀석은 엎드려서 헐떡대고 있었다. 눈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달려들긴 했다만, 새삼 자신이 얼마나 곱게 큰 도련님인지 절절히 깨닫는 중인 듯 했다. 내가 물었다.

“괜찮, 괜찮냐?”
“어흑, 도와줘서...고맙...헥헥.”
“네가 먼저 구하러 온 거 아니었어?”
“동료, 동료, 동--친구잖아! 미미가, 헤엑---미미가 그런 거 잘 해야 하---헤엑, 헤엑-”
“미미?”
“옛날-에-같이 있던.......헥, 길바닥.”
“말도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끝까...지 그런 건 아니야..헥헥.”

하긴 뭐, 아무리 사나운 여자애라도 이런 남자애라면... 추억을 쌓아보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온 몸이 떨렸다.

“그건 여자애들이나 하는 거야. 여자애들은 잘 뭉치거든. 남자들은 사실 다 따로 놀아. 어지간히 약한 녀석들 아니면.”
“왜?”
“몰라, 그냥 그래.”
“그럼....왜 날 도와준 거야?”
“어지간히 약한 녀석들이잖아, 우리.”
“아니던데...헥.”
“인간을 잊지 못하면 다 약한 녀석들이야. 자, 우리 저녁이나 먹자.”

녀석은 그제야 허기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밥그릇으로 기어갔다. 첫시작이 좋은 녀석이다. 일단 덩치가 있으니, 길거리 생활도 잘 할 테지. 자리 잡힐 때 헤어지면 되겠지. 주인한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더 먼저이긴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막 내가 그릇에 손을 가져갔을 때, 녀석이 고개를 들고 먹으려고 할 때, 등 뒤로 컴컴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가 녀석을 확 덮쳤다. 지친 녀석은 도망갈 틈도 없었다. 바로 들려져, 검은 뱀같은 것에 휘리릭 감겼다.

“찾았다!”

여자 외침이 터졌다.
응?
여자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리쿠, 찾았잖니! 차문 열어놓은 틈에 도망치다니, 이런 낯선 곳에서 어쩌려고 그랬니! 너 찾으려고 네가 좋아하는 거 여기저기 널어놓고! 어디보자, 내 새끼!”

나는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 수 밖에 없었다. 여자는 리쿠를 안고 돌리고 비비고 수선을 떨어대다, 한참이 지나서야 달달 떨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머, 친구니?”

내가 뭘 어쩔 틈도 없이 그녀는 내 멱살을 잡아다가 자기 차 안에 처박았다.





그 다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구 끌려 다니다 욕조에 첨벙 첨벙 던져졌다. 여자는 옷을 벗기고 우리들을 막 씻어댄 다음 거실에 던져두었다. 타월에 칭칭 감겨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여자가 옷을 가지고 왔다. 우유에 적신 생선에 육포 간식에 촉촉한 물과 푹신한 양털 침대까지, 그녀는 우리에게 무한히 제공했다.
마마는 마흔 초반 정도 될까, 하는 여자였다. 젊은 여자는 아니었다. 눈가에도 입가에도 주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날씬한데다가 눈은 활기차고 미소도 멋졌다. 타고난 미모의 여성이라기 보다는 탁월한 매력의 여성이었고 감각이나 분위기나 세련되고 우아했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 벽난로 선반에 놓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주인 여자의 사진들이었다. 젊은 시절의 졸업사진이라던가, 형제인 듯 보이는 사람과 찍은 사진이라던가, 부모와 찍은 사진, 등등. 부모는 둘 다 부유해보였다. 어머니는 살이 찌긴 했지만 편안히 살아온 사람의 여유로움이 넘쳐흘렀고, 아버지 역시 성공한 남자의 품위가 있었다. 여자가 병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도 있었다. 개업의사인 듯 했다.
처음부터 축복받은, 처음부터 사랑받은, 그리고 인생의 갈림길에 있을 때 서슴없이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이었다. 다른 길이 없거나 포기하면 아무 것도 없어지기에 포기할 수 없는, 그것이 파멸로 가는 길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환상이 필요 없는 여자였다. 가지고 싶으면 꿈꾸는 게 아니라 가지려고 하면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그녀에게는 아무런 길도 없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었으며, 결국 그 무엇도 그녀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그렇다.

방금 주인 여자가 잠들자, 집 안의 조명은 저녁어스름처럼 나즈막히 어두워졌다. 납작 엎드린 듯한 조명이다. 리쿠 녀석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우리는 말없이 창가에 앉았다. 거대한 창 밖으로 숲 같은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이 높다란 팰리스는 천박한 신처럼 그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 허공에 비행선이 떠다녔다. 주차탑 근처로 다니는 개인 비행선들은 벌집 근방을 붕붕 날아다니는 벌 떼들처럼 보였다. 녀석이 턱으로 창가에 놓인 선반을 가리켰다. 그 선반은 특별한 사진들이 놓여 있는 곳이다. 맨 위에는 아기 시절의 리쿠가 있고, 그 밑에는 얌전한 인상의 여자가 아이 셋에 둘러싸여 있는 사진이 있었다. 여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아이들을 끌어안고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무서운 것을 보는 듯한 눈이다. 얼굴은 머리카락으로 반쯤 가려 놓았다. 여자를 둘러싼 아이 셋은 모두 작고 귀여웠다. 다들 생글 생글 웃고 있는데, 여자만 겁에 질려 있었다.

“엄마는 눈 하나가 없어.”

리쿠가 말했다.

“대체 전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 발견되었을 때 눈 한쪽이 없고 귀의 절반이 잘려나가 있었대. 병이 심했던 데다, 온 몸에 피투성이 멍투성이였지. 다 낫는데 반년이나 걸렸다더라고. 언제나 겁에 질려 있었어. 옆에서 조그만 소리만 들려도 놀라서 후닥닥 도망쳤지. 우리들 키울 때도 그랬어. 옆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우리들을 모두 끌어안고 덜덜 떨곤 했어. 마마가 처음 나를 데리러 갔을 때도, 우리들을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어.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 그 때도. 결국 다음날 엄마를 방에 가둬둔 후에 나를 데리고 올 수 있었어. 나중에 들으니, 사흘 밤낮을 울고만 있었다고 그러더라고. 누나들이 달래줬다 그러더라고. 좋은 사람이 데려갔으니 괜찮을 거다, 정말 그러니 안심하라고.”

나는 그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대강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녀석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무력하고 법적으로는 아무런 권한도 없다, 이보다 더 매력적인 존재가 어디 있을까. 여자들은 우리들을 숭배하려고 데리고 간다. 아름답게 입히고 여기저기 전시하고 자랑하고 숭배한다. 그들의 환상이었다, 우리는. 남자들은 사랑하려고 데리고 간다. 말 많고 요구하는 것 많은 여자들 보다 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기만 하는 가녀린 존재는 충분히 환상이다. 하지만 잘못 걸리면 정말 고약한 녀석에게 걸린다. 환상은 그것을 산 자들의 마음대로 개조당해야 하는 운명이다.

녀석이 말했다.

“내가 운 좋은 녀석이란 건 알아.”
“네 마마도 운이 좋아.”
“그래도 마마가 네 새 주인을 찾아줄 거야. 마마는 까다로운 사람이라, 정말 좋은 주인을 찾아줄 거야.”
“필요 없어. 난 그냥 떠돌이 달이 올 때까지 밖에서 살 거야.”
“버리지 않을 주인을 찾아 줄 거야.”
“그런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누군가에게 내 몸을 모두 맡긴다는 것, 그들이 모든 것을 해 주어야 한다면 그들이 나를 가지고 무엇을 해도 된다는 거지. 그건 싫어.”
“배고픈 것 보다는 낫잖아.”
“내 배는 내가 채울 수 있어. 얻어먹는 것 보다야 힘들 테지만, 그래도 뭐든 대가란 게 있는 법이니까.”

난 버려졌다, 나도 안다. 확실하게 버려졌다. 그 고통을 다시 당하고 싶진 않다. 그 고독을 다시 느끼고 싶지도 않고, 그 치욕감과 울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도 않다.

나는 창가에 앉아 도시를 보았다. 비행선하나가 사방을 환하게 밝히곤 사라졌다.

그 날도 이런 창백한 날이었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무시무시하게 달려들었다. 울부짖고 하소연하고 원망하다 당장 나가라고 했다. 나가, 나가, 너 따위 싫어, 나가 버려! 뭐라 험악한 말을 했다. 그것이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주먹을 들었다. 퍽퍽, 하고 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와당탕 하고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난 구석에서 떨고만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남자가 와장창하며 무언가 찾더니, 찾던 것과는 좀 다른 것을 찾았다. 몽둥이였던 것 같다. 남자는 그것으로 그녀의 머리를 두들겼다. 피가 튀었다. 여기저기 피가 튀었다. 내 머리와 손과 가슴으로도 피가 튀었다. 머리가 깨지고 뼈가 깨지고 살이 튀었다.
마침내 모든 것이 잠잠해졌을 때, 비행선이 다시 하늘위로 부유하며 지나갔다. 사방이 한번 밝아졌다. 사방에 붉은 얼룩이 튀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고여 가는 거대한 피 얼룩 위에 그녀가 있었다. 눈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왕자가 아니었고 기사도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해줄 것은 많았으나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그녀의 환상이었으나, 환상은 구원이 아니다.
남자는 거대한 비닐봉지를 가져와 그녀를 쓸어 넣었다. 한참이나 어렵게 그 끝을 묶은 다음 끌고 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남자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거대한 차는 야외로 날아갔다. 외곽 산지에 도착하자, 남자는 여자를 놓고 땅을 팠다. 하늘이 흐려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차 속에 숨어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여자를 다 묻자, 남자는 씨근덕대며 돌아왔다. 문을 여는 순간에 나는 힘껏 날아가 그의 목을 물었다. 으르렁대고 비명을 질렀다. 턱이 부서져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며 나는 송곳니를 그의 목에 깊이 찔러 넣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남자는 피에 흠뻑 젖은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갑자기 나를 노려보더니 삽을 들고 후려갈겼다. 내가 더 빨랐다. 남자가 나를 쫓다 미끄러졌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다시 보았을 때, 자동차의 불빛이 비추는 곳에 그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는 바위를 베고 있었다.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그냥 그렇다. 나는 버림받았다. 죽어가는 눈으로 나를 보며, 그녀는 나를 증오했다. 분노하고 분노하며, 왜 내가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지 분노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그녀는 나를 버렸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환상은 깨지고 구원도 없었다. 그녀가 꿈꾸었던 그 무엇도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현실은 무자비한 몽둥이가 되어 그녀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이제 비가 그치고 구름이 씻겨나가고 있었다. 청회색의 창백한 새벽이다. 나는 그 새벽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무섭도록 추운 새벽이었다. 다시 비행선이 날아갔다. 세상이 다시 한번 환하게 밝아졌다가 성큼 어두워졌다. 녀석은 이제 양털 이불 위에 웅크리고 쿨쿨 자고 있었다. 녀석의 새카만 귀가 새벽 미명 속에 쫑긋 서 있었다.


늙은 것이 말했다.


우리를 흩뿌린 것은 떠돌이 달이다.
우리의 포자는 하늘을 떠돌고 바람에 흘러 다니다 마침내 이 지상에 가라앉았다.
달빛이 우리를 적시고 대지는 우리를 보듬어, 마침내 우리는 싹이 터 우리가 되었다.


하늘 위에 없는 그 떠돌이 달만이 우리의 벗이고, 우리의 가족이며, 우리의 반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히 혼자이다. 행복속의 인간은 하나이자 모두이며 모두이자 하나이나, 불행속의 인간은 오로지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들 인간, 그 떠돌이 달이 낳은 환상이 된다. 그리고 그 환상은 그들을 위로할 수는 있지만 구원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우리들을 구원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렇게 영원히 떠돌이 달만을 바라보며 살듯이, 그렇게 우리들은 혼자이다.





by 아울양 | 2007/04/26 23:55 | 단편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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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4/27 01:1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7/04/27 01: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사이암 at 2007/04/27 02:03
아, 이 이야기 좋네요. T_T 사랑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잘 읽었습니다. T_T
Commented by 은람 at 2007/04/27 08:18
막 눈물이....잘 읽었습니다ㅜㅠ
Commented by M.K at 2007/04/27 08:58
마마님을 세분이나 모시고잇는저로서는 흑흑흑 ㅡㅠ
인생 마마님의 지배아래 행복하게살랍니다.
Commented by 노란병아리 at 2007/04/27 10:20
와 멋지네요 ^^)b
Commented by 스트린드 at 2007/04/27 18:29
...와 눈물 나와요;ㅁ;
Commented by 나트 괴도 at 2007/04/27 22:53
.....우와.......
Commented by 리힌 at 2007/04/28 00:25
우와. 잘 읽었습니다. 멋지네요.
Commented by 아울양 at 2007/04/28 01:50
비밀글1/ 글쎄요~^^;

비밀글2/ 아닙니다;;

사이암/ 어이쿠야, 감사합니다~ -ㅁ-)/

은람/ 감사감사.

M.K/ 그런 겁니다!

노란병아리/ 감사~ -ㅁ-;

스트린드/ 어머나요;

나트 괴도/ 그 뒤에는?

리힌/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나트 괴도 at 2007/04/28 16:07
고양이 인간인가요! 아니면 고양이? 뭐랄까, 아울님 소설들의 주인공들의 공통점이 죄다 박혀 있는것 같아요... 그 태도하며, 성격하며, 끄트머리 부분 리쿠와 대화하던 포니의 말이 가슴깊이 박히네요..
Commented by laila at 2007/04/30 13:51
중간에서야 눈치를 챘습니다. ...압도적으로 멋지네요...
Commented by 저기 at 2008/05/05 21:52
-모셔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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